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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의 목소리(8)] 청년 과학기술인에 대해 말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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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10일 12:00 프린트하기

박대인 Beflex Inc., 한국과학기술원

(교정 전) [ESC의 목소리(8)] 청년 과학기술인에 대해 말한다는 것  - 김명호 작가 제공
김명호 작가 제공


청년…?


‘청년’이라는 단어로 누군가를 칭할 수 있을지 저는 항상 궁금합니다. “신체 나이는 비록 늙었지만 정신이 어리면 청년이지” 같은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학부생 때 들었던 마케팅 수업을 되돌아보면 항상 ‘시장세분화’가 중요하다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한 집단인 것 같아도 낱낱이 뜯어보면 “집단 안에는 굉장히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각자 다른 소비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 그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적합한 것은 무엇인지 찾아야한다” 정도로만 정리를 하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저도 전문가는 아니니까요.


이렇게 학부생 대상 경영학 수업에서 가르치는 간단한 수업 내용만 봐도 생각보다 이 사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이들을 하나로 정의하거나 뭉뚱그리는 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종 이 사회에서 ‘청년’들을 이야기 할 때는, 다소 극단적으로 말하더라도, 둘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혼자 하곤 합니다. ‘열정과 패기로 도전하고, 일곱 번 넘어지면 여덟 번 일어서서 자신의 미래를 혼자 힘으로 개척해나가는 그런 사람들’이라는 바람직한 ‘청년’과 “내가 젊었을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요즘 애들은 왜 패기도 없이 그런지 모르겠어!” 라는 ‘요즘 애들’ 같다는 의미로서의 ‘청년’이 그런게 아닐까 합니다.

 

GIB 제공
GIB 제공

사실 청년은, 아니, 우리 모두는 절대적으로 희망찬 사람이거나 절대적으로 비관적인 사람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기쁘기도, 슬프기도, 아프기도 그리고 우울하기도 하고 종래에는 그냥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렇기에 사실 우리들, 그러니까 청년들은, 마치 빛의 스펙트럼처럼 다양한 색깔과 결을 가지고 희망과 절망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끔 드는 생각은, 우리의 현실과는 별개로 이 사회에서 우리 젊은 세대는 아마 원하든 원치 않든 저 둘 중 하나가 이미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자 그대로 일곱 번 아니, 일흔 번씩 일곱 번 정도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열정과 패기로 극복해보려는 ‘희망찬 청년’이거나 아니면 어차피 해도 안될 것이라고, 이미 해봤는데 되는 게 없더라고 패배주의에 물든 ‘절망한 청년’이거나요. 같은 ‘청년’이라고 일컬어지지만 마치 다른 시공간대에서 살다 온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우리 “청년”들 일 것이라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입니다. 


제가 굳이 현 시대의 취업난이 어떠한지, 생활고가 어떠한지, 어느샌가 우리시대를 대표하는 말이 되어버린 N포세대가 무엇인지, 헬조선은 무엇이며, 금수저는 무엇인지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청년들은 어쩌다 보니까 태어난 세상에서 (사실 우리들이 엄청 태어나길 간절히 바래서 세상에 태어난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느 순간 정신차려보니까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는걸요…)본인들의 선택에 따른 책임이 없(어 보이)는 일들에 많은 책임을 지면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청년들은 ‘절망’하여 사회의 동정과 연민을 받거나, 마치 초인처럼 모든 역경을 극복해나가는 ‘희망’의 아이콘이 되고 맙니다.


저는 운이 좋게도 많은 부분 이 사회에서 말하는 소위 ‘청년’의 문제에서 빗겨나서 살았습니다. 제가 굳이 제 ‘노력’이나 ‘실력’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은 이유는, 그만큼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이, 우리 사회에서 저에게 조금이나마 허락된 조그만 것들이, 자칫 잘못하면 ‘증발’해버릴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처럼 엄청나게 운이 좋은 (그렇다고 제가 금수저는 아닙니다만)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한 많은 이들에게는 딱히 자신의 처지를 발언할 수 있는 기회도, 창구도 없습니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정말 다르고도 다른 사람들이기에, 그 중에서 누구를 대표한다고 말하기에는 좀 그런 제가 우리 세대의 청년을 대표한다고 하기에는 상당히 무리가 있겠습니다만 아마 우리 세대가 기본적으로, 그리고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뜻 모를 열패감과 자조와 패배의식과 비관적인 현실인식을 조금은 대변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왠지는 모르지만 우리를 희망의 아이콘으로 칭송하는 분들과 저희들의 절망과 열패감에 동정을 보내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청년들입니다. 이미 만들어진 규칙과 짜인 판 안에서 우리들에게 마음껏 꿈을 펼치라고 종용하거나 동정하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현재 살아가는 시대에 대한 책임은 우리들도 똑같이 지고 있고, 무언가가 문제라면 ‘이 나라의 미래인 청년’이 바꿔야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디 우리를 어딘가 모자라고 무언가 못미더운 사람들로만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는 멘토링을 해줘야하고, 가르침을 주어야만하고, 훈육해야만 하는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명 모자라고,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그렇게까지 무책임하거나 생각이 없지도 않습니다. 지금 청년들은 ‘단군 이래 최고의 스펙’을 지닌 사람들이지 않나요? 함께 대화하고, 같이 뭔가를 이뤄나가고, 책임 질 일이 있으면 다같이 졌으면 좋겠습니다. 학교에서는 적어도 저에게 그렇게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저 현재를 살아가는 ‘신체나이가 젊은’ 시민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그리고 청년과학기술인


과학기술인들, 그 중에서도 우리 세대의 젊은 과학기술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나이로는 20대에서 40대까지, 남녀중에서는 남자들이 많겠고요, 정규직보다는 비정규직, 심지어는 그런 분류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규격 외의 집단이 대부분입니다. 우리에게는 스스로를 정의하는 일조차 사치입니다. 생각해보니, 우리들은 애초에 우리가 무엇인지 정의할 선택권을 가져본 적도 없습니다. 

 

젊은 연구자들은 경험을 더 쌓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강의에 내몰립니다. 하지만 연구실적을 내는 것은 별개의 일이고 강의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교육자로서 성실하지 못하다는 비난을 받습니다.

 

많은 연구 초년생들은 연구 환경을 구축하기 위한 자금을 지원받지 못해 빚까지 내고있지만, 신진연구자에 대한 투자는 절대적 규모가 작습니다. ‘신진’ 연구자이기 때문입니다. 경험을 쌓아야만 연구비의 수준이 올라갑니다. 대학원생들은 서류상으로는 학생이지만 현실에서는 노동자이고 평가를 받을 때는 독립적인 사회인 (혹은 심지어 전문가)이었다가 보상을 받을 때는 다시 교육적 잣대 – 나이가 어리니까, 젊으니까, 아직 학생이니까 - 를 마주하고 제값을 받지 못합니다.


청년과학기술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는 이 사회의 청년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 모두에 이 사회의 과학기술인들이 겪고 있는 문제점들이 합쳐진 형태가 아닐까요? 학령인구가 줄어들고 있고, 많은 연구자들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했던 대학교는 조만간 신입생들의 수가 급감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정규직 일자리들은 예전과 비교해서 절대적으로 적어졌고, 학부4년 석사 2년 박사 4~5년의 기간을 거쳐 이공계 박사자격을 따더라도 취직이 마냥 쉽지는 않습니다. 학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많은 이공계 전공자들은 박사 후 연구원 취직을 하면서 언젠가 정규직이 될 날을 꿈꿉니다.


언뜻 보면 한국사회는 정말 과학발전에 관심이 많은 나라 같습니다. 노벨상 때만 되면 공중파 뉴스에도 과학계 소식들이 나옵니다. <인터스텔라>는 전대미문의 흥행을 했고, 사실은 굉장히 과학적인 영화 <마션>도 한국에서 꽤 흥행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교양만화도 과학관련 만화들이 많고, 과학관을 가보면 순 어린이들 천지입니다. 과학강국 대한민국의 미래는 밝아만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과학자의 꿈을 키워 20대를 다 바쳐 과학공부를 하고 나면 일자리가 없습니다. 한국의 실업문제, 그 중에서도 청년실업 문제는 당연하게도 심각한 문제입니다만, 전문직이라고 일컬어지는 과학계의 실업 문제 또한 꽤 심각한 문제인 듯 합니다. 열심히 공부한 끝에 보상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 분야로 어떤 인력들이 지원을 하는 것일까요? 중학교에서 가르치는 수요와 공급곡선에 따르면, 수요가 작을 때 공급이 많으면 가격이 내려가게 됩니다. 미스매치가 일어나는 것이죠.


현재 한국에서 흡수할 수 있는 과학계 공학계 인력의 수요는 어찌보면 (A)그 한계치에 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그 (B)한계치가 의도적으로 낮춰져 있던가요. 둘 모두 문제입니다.


한계치에 달했다면(A), 1)공급을 줄여야 하거나 2)수요를 늘려야 합니다. 1)을 하려면 이공계로 사람들을 유치하거나 유입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과학기술은 국가발전의 원동력이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한국에서 이공계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이나 지원 정책, 영재교육 정책은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실패겠지요.

 

2)를 하려면 국가에서 양질의 이공계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장기적인 국가의 방향 설정과 체질 개선이 필요합니다. 말그대로 한국에서 이공계 인력을 흡수하던 연구소 시스템과 대학교 시스템을 체계적으로 손보아야 할테니까요. 그런데 한국은 5년 단위로 정책기조가 바뀌고, 5년 단위로 부처가 생겼다가 없어졌다가, 위원회가 만들어졌다가 말았다가 하는 나라이지 않습니까? 이것 또한 실패할 가능성이 크겠습니다.


수요의 한계치가 의도적으로 낮춰져 있다면(B), 이는 어찌보면 이러한 인력들을 수급받는 기관들에게는 이득일지도 모릅니다. 양질의 우수 연구인력이 구조적인 문제로 인한 수요-공급의 미스매치 때문에 시장가격이 내려가 있는 상태이니까요. 이 인력들을 수급하는 기관에서는, 세금으로 길러진 우수한 인력들을 시장가격보다 싼 가격에 영입할 수 있습니다.

 

과잉공급된 인력들끼리는 자신들이 해결할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 (낮춰진 인력시장의 수요치)에 대응하기보다는 - 이는 앞서 말했듯 사회구조적인 문제라 긴 호흡이 필요한 일일 겁니다 - 개인의 스펙과 능력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을 더 많이 하는 것이 개개인에게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 아닐까요? 그 와중에 더 커다란 이득을 보는 것은 자발적인 무한경쟁을 통해 만들어진 ‘한층 더’ 우수한 인력을 비슷한, 혹은 더 싼 가격에 공급받는 기관들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의 힘든 현실’을 더 많이 이야기 했으면 합니다. 과학기술계의 많은 청년들은 아직 젊다는 이유로, 그리고 현재의 어려움이 미래까지 이어지지는 않으리라는 희망으로 당장의 현실을 견뎌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청년은 미래의 주역이라고들 합니다. 대학원생들은, 청년 연구자들은 학문후속세대라는 말 또한 듣습니다.

 

미래의 주역이라는 말은, 학문 ‘후속’ 세대라는 말은, 약간 잔인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미래에만 주역일 수 있는 우리들은, ‘청년’이라는 미묘한 범주 하에 절망 또는 희망의 두 단어들로 간단하게 규정되어지곤 하는 우리들은, 실제로는 주역이었던 적이 한번도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까지나 학문 ‘후속’ 세대이니, 사실 우리가 하고 있는 학문은, 거쳐가고 있는 학문적 트레이닝과 수련은 ‘현재’의 것이 아니라는 말로 해석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스스로를 학문후속세대라고 정의한 기억이 없습니다. 이것 또한 누군가에 의해 덧씌워진 또 하나의 가면입니다. 청년과학기술인들은, 그리고 우리 청년들은, 현재의 훈련 속에서 현재의 학문과 노동과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자체로 학문세대이지 학문 ‘후속’ 세대이거나 ‘후속’ 세대가 아닙니다. 21세기 한국에서 지금 학문을 한다는 것이 앞으로 죽을 때까지 학문을 하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를 학문후속세대라고 정의하는 것은 학문의 불씨를 살리는 데에는 도움이 되겠으나 현재 우리의 삶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현재의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데 미래의 우리를 인정해준다는 보장은 또 어디에 있을까요? 학문후속세대는 개개인의 청년 연구자가 스스로를 그 이름으로 정의할 때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지, 다른 이가 우리를 뭉뚱그려 학문후속세대라고 지칭한다고 하여 체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호화로운 미사여구로 우리의 정체성이 포장된 들, 스스로가 정의한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한 번도 주역이었던 적이 없던 우리가 그럼 미래에 주역이 되면 이 나라를 갑자기 기적적으로 잘 이끌어나갈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정말 미래에 주역이 될 것이라면 현재 우리는 우리가 미래의 주역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나요? 아니면 미래에 주역이 되면 어떻게 하라는 가르침을 받고, 보고 배울 건 있었을까요? 우리들은 언제까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담보로 ‘우리의 시간’이라고 계속 들어온 미래를 기다려야 할까요? 기다려서 그 미래가 온다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야할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고, 일상은 이어질 것이고, 청년들인 우리들의 삶이 아마 극적으로 나아질 일이 딱히 가까운 미래에 보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있다면 저에게 알려주시면 저도 희망차게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원래 그렇게 딱히 희망적인 사람이 아닌지라 제 삶이, 제 주변 청년들의 삶이 극적으로 나아질 일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그렇게 많이 들지는 않습니다.


지금까지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부탁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 글은 해결책을 제시하는 글도 아니고, 미래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는 글도 아니고, 청년세대를, 또 과학기술인들을, 더 나아가서는 ESC를 대표하는 글도 아닙니다. 많은 분들은 대안과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인상비평에 지나지 않는 불평불만만을 늘어놓은 글이라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이 글은 딱히 인생에서, 생활에 불편을 겪어보지 못한, 국가의 혜택을 받을만큼 받은 평균이상의 학력자가 쓴 불만 표출입니다. 하지만, 이 불만과 불평을 통해 조금이나마 제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 세대가 느끼는 점을 표현했다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디, 우리를 정의하고 재구성하지 말아주십시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십시오. 우리의 다른 점과, 우리의 비슷한 점을 알아주십시오. 우리를 동정하거나 어여삐 여기지 말아주십시오. 무작정 가르치시거나, 대놓고 무시하지 말아주십시오. 민주주의사회에서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권리를 행사하는 것일 뿐인데 이렇게 부탁하는 게 학교에서 배운 제 머리는 정상은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 하지만, 우리를 끼워주십시오. 우리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고, 그를 통해 성장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그 기회가 올 때까지, 아니, 그 기회를 얻어내어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때까지, 저는 그리고 우리들은 끊임없이 ‘절망’하고 ‘희망’하며 ‘좌절’하고 ‘노오력’하고 있겠습니다.

 

 

※편집자주

한국 사회가 ‘합리적’으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요? 과학기술이 각종 논란의 중심이 되는 일이 점점 많아집니다. 그런데 대안을 내는 과정에 과학기술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과학기술자들의 의견을 듣는다고는 하지만 다양한 의견이 아닌, 어떻게 결정됐는지 모호한  ‘일치된 의견’이 성명서로 발표되곤 합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현장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과학기술자들이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ngineers & Scientists for ChangeㆍESC)’를 만들었습니다. 동아사이언스는 과학기술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ESC의 목소리를 전합니다. 주로 △나의 연구, 나의 실험 △내가 보는 과학과 사회 △연구윤리/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책임 △확실한 과학, 논쟁적인 과학 등 4가지 분야의 글이 소개됩니다. 동아사이언스를 통해 과학기술계의 다양한 의견이 오가고, 합리적이고 건강한 토론이 이뤄지기를 바랍니다.

 

※ESC에 대한 정보는 ESC 홈페이지(www.esckorea.org)를 참고하세요. 궁금한 사항은 office@esckorea.org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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