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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시선 47] 이탈리아에서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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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07일 18:00 프린트하기

2001년의 일이다. 그해 봄, 나는 직장 일로 이탈리아 출장길에 올랐다. 국제 아동 도서 박람회인 ‘볼로냐 도서전’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아동 도서 박람회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인 그 행사에서 그해의 세계 아동 도서 시장을 살펴보고 수입할 만한 책들을 찾기 위해 국내의 수십 개 출판사 관계자들도 그곳으로 떠났다. 당시 대부분의 출판인들은 여행사를 통해 유럽 여행을 겸할 수 있는 패키지로 한데 움직였지만, 나와 한 출판사 편집인은 좀 더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다니고자 단둘이 별도의 일정을 잡아서 개별적으로 예약한 비행기에 올랐다.

 

GIB 제공
GIB 제공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했지만 2시간 뒤 우리는 다시 이탈리아 볼로냐로 향하는 열차 한 량 크기의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로 갈아타야 했기에 독일 풍경은 고작 이착륙 때 공중에서 잠시 훑어볼 수밖에 없었다. 볼로냐에서의 일을 마무리하고 우리는 로마로 이동했다. 그리고 이튿날 열차를 타고 우리는 피렌체로 향했다. 서울에서 일정을 잡을 때 내가 요구한 까닭이었다. 이탈리아는 볼거리가 너무 많아서 흔히들 유럽 여행의 마지막 코스로 잡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런 코스에서는 피렌체는 빠져 있지만 나는 르네상스의 본거지인 피렌체를 꼭 가보고 싶었다.


저녁 8시경에 도착한 우리는 어리둥절했다. 고작 서울의 마포구만한 그 작은 도시에 청소년들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경주 답사 수학여행단을 방불케 했다. 우리는 그 단체 학생들을 피해 후미진 길을 걸으며 가장 저렴해 보이는 호텔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모두 예약되어 빈방이 남아 있지 않았다. 10시를 넘어서까지 우리는 미로 같은 좁은 골목길을 헤매며 작은 호텔들을 드나들었다. 그러다가 그날 밤 우리를 유일하게 받아준 어느 허름한 호텔에서 간신히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호텔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별 두 개짜리 그곳에 들어서기 직전에 우리는 근처의 아담한 호텔을 방문했는데 그곳 프런트에서 60대로 보이는 지배인에게 소개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한밤까지 숙소를 못 구해 헤매고 있는 우리의 형편을 알아보는 눈치였다. 그곳에 전화까지 해준 그는 손짓을 동원해 방향을 가리키며 서툰 영어로 그곳까지 가는 길을 알려주고는 우리에게 담배를 피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내가 대답하자,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걸으면서 담배 한 대를 다 피우면 그곳에 도착할 거요.”


피렌체의 아름다움은 곳곳에 널려 있었다. 길모퉁이만 돌아도 르네상스 조각품이 서 있었고 ‘두오모(duomo) 성당’ 꼭대기에 이르는 나선형 돌계단은 발걸음들의 세월로 깊이 파여 있었다. 아르노 강이 흐르는,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처음 만났던 ‘베키오 다리’ 한가운데엔 그 역사적 현장에서 세계 곳곳으로 통화할 수 있게끔 공중전화 부스가 놓여 있었다. 한 여행자가 그 전화기를 들고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줄 알아? 내가 그 유명한 단테의 다리에서 당신 이름을 부르고 있어.”

 

GIB 제공
GIB 제공

다음 일정 때문에 피렌체에서 하루밖에 머물지 못한 걸 아쉬워하며 다시 로마로 돌아가는 열차에 올랐다. 우리 옆자리에도 자리가 채워졌다. 한 사람은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이십대 여성이었고, 또 한 사람은 대학교수로 보이는 오십대 남성이었다. 예의상 간단한 인사를 나눈 것으로 봐서 그 두 사람은 우연히 좌석 배치를 받은 낯모르는 관계인 듯했다. 앉자마자 남성은 두꺼운 책을 펼쳐 읽었고, 여성은 노트를 꺼내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필기 기록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내가 알아들 수 없는 이탈리아어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의 태도로 봐서는 거의 토론을 하고 있는 듯했다. 대화 도중에 책을 펼쳐 보이며 상대의 이해를 돕는 듯한 그들의 모습은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한국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그들의 대화는 한 시간가량 지속되었고 언제 끝났는지 모르게 그 두 사람은 각자의 책과 노트에 시선을 데려다놓았다.


내가 낯선 피렌체를 다녀오며 만난 것은 두오모 성당 천장에 그려진 「최후의 심판」이나 미켈란젤로 광장의 「다비드 상」을 비롯해 골목 곳곳에서 마주치는 르네상스의 탁월한 예술 조각품들만이 아니라, 그곳 호텔 지배인의 유머러스한 안내와 역사 현장에서의 러브 레터 같은 통화와 열차 안에서 본 이방인의 진지한 대화였다. 나에겐 그것이 피렌체였고 이탈리아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흔히 (도장처럼 마음에 새겨지는 느낌이라는 말로) ‘인상’(印象)이라고 부른다.

 

 

※ 필자 소개

윤병무. 시인. 시집으로 ‘5분의 추억’과  ‘고단’이 있으며, 동아사이언스 [생활의 시선]을 연재하고 있다.

 

※ 편집자주

뉴스를 보다보면 무엇인가를 분석해서 설명을 해주는 내용이 대다수입니다. 그래야 원인을 정확하게 찾고,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가끔은 고개를 들어 사물을 그대로 보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대상을 온전히 바라보면 분석한 내용을 종합할 수 있는 통찰력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시인의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는 ‘생활의 시선’을 매주 연재합니다. 편안한 자세로 천천히 읽으면서 감정의 움직임을 느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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