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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보통과학자]동물행동학자에서 과학행정가로 변신한 후베르트 마르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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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재의 보통과학자]동물행동학자에서 과학행정가로 변신한 후베르트 마르클

2020.07.16 17:27

현재 전세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미국 과학기술정책의 초석을 놓은 인물은, 공학자 배너바 부시다. 전쟁이 끝나고 “정부가 과학기술에 왜 투자해야 하는가”를 묻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질문에, 젊은 공학자 배너바 부시는 《과학, 끝없는 프론티어》라는 보고서로 답한다. 그 보고서에서, 배너바 부시는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 의료와 산업 등에 사용되는 원천기술을 발굴하는 중요한 투자라고 대통령을 설득했고, 그의 선형적 발전론은 이후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의 과학기술정책에 영향을 미쳤다⁠2. 부시는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적인 미국과학재단(NSF)를 세우며 과학행정가로서 뛰어난 역할을 했고, 바로 그의 활약으로 미국의 과학기술자들은 안정적이고 독립적인 연구환경을 지니게 될 수 있었다. 과학기술자의 정체성을 지닌 채, 연구현장과 정치 그리고 행정을 연결하는 과학행정가의 역할은, 한 사회의 과학기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과학행정가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미국 과학기술정책의 초석을 놓은 배너바 부시다. 하지만 그는 공학자였다. 위키미디어 제공
과학행정가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미국 과학기술정책의 초석을 놓은 배너바 부시다. 하지만 그는 공학자였다. 위키미디어 제공

20세기 중반부터 미국이 전세계 과학기술을 선도한 건 사실이지만, 독일 또한 전쟁의 상처를 복구하면서 빠르게 예전 과학기술 최고 국가의 영광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7월 2일자 독일의 과학엔 특별한 것이 있다) 독일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견인한 국립연구소들의 존재가, 현재 독일 과학기술이 미국과 중국 주도의 과학기술계에서도 뒤쳐지지 않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다. 특히 막스플랑크연구회는 전쟁 이후부터 지금까지 독일의 기초과학을 지켜낸 독특한 전통과 철학, 그리고 문화로 유명하다. 바로 그 막스플랑크 연구회의 철학과 문화를 만들고 지켜나가는 건 과학자들만의 역할이 아니다. 거기엔 과학행정가들의 숨은 희생이 녹아 있다. 후베르트 마르클은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진 직후 막스플랑크 연구소의 총재가 되었고, 통일 이후 위태로울 수도 있었던 막스플랑크의 역할과 기능을 조율해낸 과학자이자 과학행정가다.


동물학자에서 과학행정가로


후베르트 마르클의 이력에서 가장 특이한 점은 과학기술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미국의 배너바 부시나 한국의 최형섭처럼 공학자가 아닌 기초과학자라는 점이다. 마르클은 1938년 독일 로젠부르크라는 도시에서 태어나 20세기 초반 독일에 노벨상을 안겨준 동물행동학자 칼 폰 프리슈, 콘라드 로렌츠 등의 영향력 아래서 동물행동학자로 자신의 경로를 잡았다⁠. 박사과정 이후 그는 잠시 미국의 하버드대와 록펠러대에서 연구를 수행했고 코넬대과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교수 제안을 물리치고 독일 다름슈타트공대에서 교수직을 시작했다.

 

후베르트 마르켈은 동물학자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통일 독일의 기초과학을 위해 과학행정가로 변신했다.
후베르트 마르켈은 동물학자로 경력을 시작했지만, 통일 독일의 기초과학을 위해 과학행정가로 변신했다.  막스플랑크 협회 제공

과학행정가로 완전히 변신하기 전까지 마르클이 연구했던 주제는 곤충들이 어떻게 감각기관을 통해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가였다. 그는 이런 연구들을 통해 동물의 사회성 연구로 점점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동물행동학이 독일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당시에 베르트 휠도블러나 에드워드 윌슨과 같은 저명한 동물행동학자들과 함께 동물행동학의 권위 있는 학술지 BES를 함께 창간하기도 했고, 40세가 되기 전 이미 과학자로 성공가두를 달리고 있었다. 

 

마르클의 부고를 쓴 저명한 동물행동학자 베르트 휠도블러는, 1986년 마르클이 독일과학재단의 최연소 이사가 되고, 이후 다양한 독일 과학행정기관을 돌며 과학행정가의 길에 들어선 것을 조금은 후회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동물행동학자로 마르클의 동료이기도 했던 휠도블러에겐, 과학행정가의 직책을 맡으면서 마르클이 희생해야만 했던 그의 연구가 가장 중요하게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휠도블러 같은 관점과 세계관을 지니고 살아간다. 과학자에게 연구가 가장 중요한 삶의 부분이 되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안정적으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과학연구의 본질과 중요성을 잘 아는 과학자사회의 누군가가, 과학연구비와 행정을 다루는 정치의 영역에서 그 소중한 과학을 지키기 위해 자리잡고 있어야만 한다. 마르클은 그런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을 뿐이다.

 

과학자사회의 누군가는 과학행정가의 길을 걸어야만 한다. 우리는 그들을 흔히 과학계의 리더라고 부르고, 한국에도 그런 과학계 리더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과학행정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목표와 철학에서, 마르클과 한국의 과학계 리더들은 크게 다르다. 뒤에서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마르클이 자신의 학문적 성과를 포기하고 독일 과학행정을 혁신하기 위해 헌신한 이유는, 독일의 통일이라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과학계의 균형과 안정적인 지원을 위해, 과학 현장을 잘 알고 과학현장을 대변할 수 있는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마르클이 과학행정에 헌신하게 된 가장 큰 계기 중 하나는 통일 독일의 과학 후속세대들이 좀 더 안정적이고 창의적인 분위기에서 연구를 지속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그의 의지 때문이었다⁠. 

 

한국의 과학계 리더들은, 과학계 전체의 이익과 학문후속세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과학행정에 뛰어드는 경우가 태반이다. 따라서 과학계 리더들이 국회에 입성을 해도, 과학계가 바라는 혁신이 이루어지기 힘든 것이다⁠8. 한국 과학계 리더들의 더 큰 문제는, 그들이 마르클처럼 과학기술자의 정체성을 통해 행정을 대하지 않고, 과학기술자의 정체성을 그저 도구적으로 이용한다는데 있다. 마르클은 오직 독일 과학계의 발전을 위해 행정가의 길을 걸었다.

 

과학자의 정체성 그리고 독일 과학 생태계

 

마르클은 동물행동학자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동물행동학은 돈이 되지 않는 기초과학이었다. 게다가 마르클은 연구자로 이미 뛰어난 성공을 거둔 과학자였다. 누군가는 마르클 또한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과학행정가의 삶을 시작했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하지만, 마르클이 이후 과학행정가로 보여준 삶의 궤적은, 그가 과학계의 더 큰 목표를 위해 자신의 연구를 희생한 과학자였음을 말해준다. 

 

마르클이 막스플랑크연구회의 제6대 총재로 임명된 것은 독일이 통일된지 6년 후인 1996년이었다.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한국의 과학계 리더들과 비교하면 어린애 수준의 젊은 과학자가 독일 기초과학의 총책이 된 것이다. 막스플랑크연구회는 ‘하낙원칙’이라는 철학에 따라 운영되며, 언제나 저명한 과학자에게 운영의 자율권을 맞겨 왔다. 따라서 막스플랑크연구회의 총재 또한 각 연구소장들 중에서 선정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당연히 역대 총재들은 모두 저명한 과학자의 삶을 살아온 이들 뿐이었고, 또한 막스플랑크연구회 소속의 과학자였다⁠.

 

하지만 마르클은 막스플랑크연구회의 최초이자 마지막 외부 영입 총재였다. 즉, 마크클은 단 한번도 막스플랑크연구회로부터 연구비나 다른 지원을 받은 적 없는, 막스플랑크연구회의 외부인이었던 셈이다. 독일에서 막스플랑크연구회의 총재는 절대적인 권한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총재의 임기는 6년으로 1회의 연임이 가능하며, 대부분의 경우 12년의 임기를 모두 채우고 퇴임한다. 총재는 2만여명에 달하는 막스플랑크 연구회는 물론 연구회 산하의 여러 기관을 모두 경영하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독일 기초과학은 물론 학술계 전반에서 가장 큰 권한을 지닌 인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구회 소속의 연구소장들로만 선출되어 왔던 총재직에, 처음으로 외부에서 총재가 임명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1990년 갑작스레 찾아온 독일의 통일과 관련이 있다. 서독에 비해 과학기술 인프라가 뒤쳐져 있던 동독으로 연구회를 확장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학계를 잘 이해하는 것을 넘어, 균형잡힌 정치적 행위와 과감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되었다. 바로 이 시기에 독일 정부는 나이는 젊지만, 그동안 과학행정가로서 과감한 혁신을 보여온 마르클을 투입하는 묘수를 두었고, 마르클은 연구회 예산의 75% 이상을 동독 지역에 투입하는 과감한 행정을 통해 통일 독일의 과학계를 준비해나갔다.


이기적인 과학자들, 그리고 과학행정의 미덕


2011년 한국에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설립되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서울대 생물학과 이일하 교수는 브릭 게시판을 통해 “기초과학연구원이란 블랙홀에 기초과학 연구비 씨가 마른다”는 주장을 올려 과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그의 논리는 한국에서 나름 괜찮게 연구를 진행해온 기초과학자인 자신조차 기초과학 연구비의 파이를 독식한 IBS 때문에 실험실을 닫을 지경이라는 호소였다. 한국 기초과학의 진흥을 위해 여러 정권을 거치며 겨우 정착했던 IBS는 단장으로 선출되지 못한 여러 대학 교수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런 의견들을 조율하느라 우왕좌왕해야만 했다⁠. 그 당시 한국의 기초과학계에는 이런 다양한 의견을 조율하고, 강력하게 정부와 과학계를 설득시킬 리더십이 부재했다. 한 사회의 과학계가 과학진흥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공유하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파이가 줄어들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한국의 과학자들 또한 IBS 사태를 통해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마르켈이 연구회의 총재가 된 시기가 바로 한국이 IBS의 연구비 독점으로 신음하던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독일의 연구비 예산이 크게 증가하지 않은 상황에서, 마르클에겐 서독과 동독의 기초과학 인프라를 균형있게 발전시켜야만 해야만 하는 역할이 주어졌던 것이다. 서독의 과학자들이 정부에 얼마나 크게 반발했을지는 뻔한 일이다. 예산이 거의 고정된 채 대부분의 예산이 동독으로 넘어가는 상황에서, 당장 연구를 수행해야 하는 서독 과학자들은 크게 반발했고, 마르클은 그들을 설득하고 달래며 개혁을 추진해야만 했다. 그는 총재로 취임하고 나서 동독 과학계를 빠르게 서독과 비슷한 수준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고, 이를 위해 서독에 위치한 연구회의 낡은 리더십을 개혁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겨우 6년의 재임기간 동안 전체 연구소장의 3분의 2를 새롭게 위촉했는데, 이 과정에서 연구회 내부로부터 엄청난 비판을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새로 위촉된 연구소장 중 44명을 과감하게 구동독지역에 위촉하면서, 흔들리지 않고 통일 독일의 과학계를 준비해 나갔다.

 

이렇게 과감한 개혁의 칼을 들어야만 했기에, 독일 정부가 1996년 막스플랑크연구회 외부에서 총재를 선임한 것이다. 독일의 과학계 원로들에게 많은 욕을 먹기도 했지만, 마르클은 아주 공정한 평가제도를 구축하고, 젊은 신진 과학자를 위한 획기적인 기회들을 마련해서, 통일 후 독일 과학계가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세우는데 모든 노력을 쏟았다⁠. 마르클은 ‘거친 사람’이라는 악명으로 유명했고, 어떤 토론회에서도 날카로운 논쟁을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70세 생일에,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세계적인 독일 과학계 내부에도, 과학행정을 통해 개혁해야만 하는 적폐는 존재했고, 젊고 거칠고 급진적이었던 과학자 마르클은, 과학 현장의 목소리와 통일독일이라는 사회적 과제를 모두 포용하며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독일 기초과학의 위용을 건설한 인물이다. 도대체 어떻게 기초과학자로 성장했던 인물이, 정무적 판단과 끈질긴 설득이 필요한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그건 어쩌면, 마르클에게 과학자의 정체성 이외에, 오랫동안 훈련된 독서와 글쓰기로 단련된 인문적 교양이 녹아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참고자료 
-배너바 부시의 선형적 발전론은 모든 국가에 동일하게 적용되기 어렵다는 점이 드러났다. 하지만 당시 그의 적극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미국은 지금처럼 기초과학의 중흥기를 겪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배너바 부시와 그의 보고서에 관해서는 다른 글을 참고할 것.  김우재, 연어가 강물을 거슬러 오르지 않을 때,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http://saesayon.org/2010/07/09/10076/
-마르클의 죽음에 대한 여러 부고들 중에, 개미의 사회성 연구로 유명한 베르트 휠도블러 박사의 부고를 추천한다. Hölldobler, B. (2015). Hubert (Jim) Markl 1938–2015. 다음의 부고도 참고할 만하다. Krull, W. (2015). Hubert Markl (1938–2015). Nature, 518(7538), 168-168.
-마르클에 대해 국내에서 찾을 수 있는 기사는 동아사이언스에 강석기가 쓴 부고 뿐이다. 강석기는 이 부고에서 아주 간단하게 그의 업적을 소개하고 있다. 강석기, [2015년 사라진 과학계 별들] 독일 과학계 구조조정을 이끈 ‘후베르트 마르클’, 동아사이언스 http://dongascience.donga.com/news.php?idx=9227
-박시훈, & 정선양. (2019). 독일 공공연구기관의 성공요인 분석: 막스플랑크연구회 (Max Planck Gesellschaft) 의 사례를 중심으로. 기술혁신학회지, 22(5), 749-779.
-IBS의 역사에 관해서는 보통과학자에 연재된 지난 글들을 참고할 것.
-IBS의 설립으로 기초과학 연구비 분배가 양극화 논쟁에 휩쓸렸을 때, 한국 과학계의 리더십은 작동하지 않았다. 
-마르클이 통일 독일 상황에서 총재로서 맞이해야 했던 어려움은 다음 아티클에 잘 나와 있다. 
-막스플랑크 협회 https://www.mpg.de/8835793/hubert-markl-obituary

-김우재, [야! 한국 사회] 박정희와 과학 원로들, 한겨레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06760.html

-이일하, "기초과학연구원 '블랙홀'에, 기초과학 연구비 씨가 마른다", 사이언스올 http://scienceon.hani.co.kr/119442

 

※필자소개 

김우재 어린 시절부터 꿀벌, 개미 등에 관심이 많았다. 생물학과에 진학했지만 간절히 원하던 동물행동학자의 길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포기하고 바이러스학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박사후연구원으로 미국에서 초파리의 행동유전학을 연구했다. 초파리 수컷의 교미시간이 환경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신경회로의 관점에서 연구하고 있다. 모두가 무시하는 이 기초연구가 인간의 시간인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다닌다. 과학자가 되는 새로운 방식의 플랫폼, 타운랩을 준비 중이다. 최근 초파리 유전학자가 바라보는 사회에 대한 책 《플라이룸》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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