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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적 저널 한국 수학계 좀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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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탈적 저널 한국 수학계 좀먹고 있다"

2021.03.16 03:15
외국인 연구자 대한수학회에 국내 논문 수백편 투고 정황 제보
대한수학회 제공
대한수학회 제공

한 익명의 외국인 수학자가 최근 국내 수학자들의 최대 학술 모임인 대한수학회에 '약탈적 저널'에 논문을 투고하는 한국인 연구자가 많다는 내용의 메일을 보내 국내 수학계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약탈적 저널이란 논문 게재를 조건으로 게재료를 뜯어내는 행태를 보이는 학술지로, 이윤만을 추구하는 점을 악용해 수준이 떨어지는 논문을 게재하려는 연구자들의 가짜 학문 제조공장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15일 수학계 관계자에 따르면 대한수학회는 ‘한국 수학계를 좀먹는 2개의 과학기술논문추가인용색인(SCIE)급 저널(Two SCIE journals killing the Math Community in Korea)’이라는 제목의 메일을 익명의 외국 수학자로부터 받았다. 이 외국 수학자는 메일에서 "약탈적 저널이 의심되는 두 수학 학술지에 한국 연구자들이 지금까지 수백 편의 논문을 투고했고 이를 통해 교수 채용, 승진, 연구비 심사 등의 혜택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또 메일 끝에 "한국 수학계의 분별 능력이 의심된다"는 내용도 적었다.  이런 내용은 대한수학회가 지난 1월 18일 소속 회원들에게 이 외국 수학자의 메일 내용을 공개하면서 처음 알려졌다. 

 

약탈적 저널은 엄격한 동료 검토(피어 리뷰)를 거치지 않고 논문을 저널에 실어준 후 연구자들에게 서로의 논문을 인용하도록 조장해 피인용 지수(IF)를 높이고 있어 최근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연구 진실성과 연구 윤리 문제의 중심에 서있다.  학술정보 기업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를 비롯해 유명한 논문 정보 분석 업체들은 학술적 기여도가 높은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나 SCIE의 피인용 지수를 반영하고 있어 겉으로는 저명한 저널로 보인다. 자연스럽게 논문 게재를 요청하는 연구자가 늘고 논문당 약 2000달러(약 227만 원)의 게재료를 받아 막대한 이윤을 챙기고 있다. 

 

이번에 외국 수학자가 지적한 약탈적 저널은 스위스 바젤의 출판사인 MDPI가 발행하는 저널인 ‘매스매틱스(Mathematics)’와 ‘시메트리(Symmetry)’다. MDPI는 1996년 설립된 출판 그룹으로 현재 수학, 과학, 공학 분야에서 321개의 저널을 오픈 엑세스 형태로 발행하고 있다. '오픈 액세스'는 논문을 온라인으로 발행해 누구나 무료로 공유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저널은 논문을 열람하는 사람이 돈을 내지만 오픈 액세스 저널은 논문을 게재하는 사람이 돈을 낸다. 돈이 들지만 그만큼 많은 연구자가 열람할 수 있어 논문의 피인용 지수가 커질 확률이 높다.

 

이 외국 수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두 저널은 보통 한 두달 안에 동료 검토, 게재 승인, 출판까지 해주고 빠르면 10일 이내에 논문을 내주기도 한다. 통상적인 수학 저널의 경우 논문이 게재 승인되기까지 대략 1년이 걸리는 것과 비교해 논문 검토 기간이 아주 짧다. 검토 과정이 부실하다는 의혹을 피하기 힘들다. 심지어 저널의 편집장이 논문 게재를 승인하는 대신 MDPI에서 출판한 논문 몇 개를 인용하라고 권하기도 한다.

 

물론 MDPI에서 발행하는 저널이 모두 약탈적 저널인 것은 아니다. 연구자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커뮤니티인 '하이브레인넷'을 보면 일부 저널은 약탈적 저널이 의심되지만 다른 저널보다 검증 절차가 꼼꼼한 저널도 있다는 의견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미뤄보면 MDPI의 일부 저널에한해 에디터가 약탈적 행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 

 

국내 수학계 한 관계자는 MDPI가 논문을 검토해달는 요청이 있었고 논문 수준이 낮아 승인을 거절했는데도 한 달 후 출판된 사실이 있었다고 전했다.

 

대한수학회는 MDPI에 관한 회원 의견을 종합해 이달 초 MDPI에서 출판한 논문을 연구 실적으로 인정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대한수학회 측은 "MDPI 저널의 실상을 모르거나 저널 프로세스의 개념이 부족해 투고한 경우가 있어 도덕적 책임을 묻는 게 불가능해 보인다"며 "약탈적 저널로 의심받거나 평판이 나쁜 저널에 출판된 논문을 임용, 승진, 연구비 심사에서 인정하지 말고 만에 하나 인정해야 한다면 외부 학자에게 따로 논문심사를 받기를 권고한다"고 말했다.

 

클래리베이트 애널리틱스에 따르면 매스매틱스에는 한국 국적의 연구자 549명이 국내외 285개 대학 소속으로 논문을 실었다. 또 시메트리에는 872명이 397개 대학 소속으로 논문을 실었다. 대한수학회 말대로 일부 몇몇 연구자는 해당 저널이 약탈적 저널인지 모르고 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몇몇 연구자는 실적을 부풀리기 위해 일부러 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피인용 지수로 연구를 평가하는 문화다. 

 

한상근 KAIST 수리과학과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피인용 지수에 의존하지 않는 학술 검증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교수는 "미국의 주요 대학처럼 스스로 만든 검증 시스템이 없으면 피인용 지수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며 "일본의 경우 논문 검토 위원을 사전에 공개하고 위원들은 자기 이름을 걸고 심사에 임한다"고 말했다.

 

최수영 아주대 수학과 교수는 "수학의 훌륭한 연구 중에는 내용이 심오해 이해하는 사람이 적어 오히려 많이 인용되지 않을 수 있다"며 "저널의 질은 피인용 지수가 아닌 그 저널의 역사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피인용 지수를 쫓는 문화로 약탈적 저널이 생겨나고 이것이 학문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다"며 "과거 부실학회 사건처럼 연구자들에게 경각심을 줄 수 있도록 과학기술정보통신부나 교육부 차원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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